본문 바로가기
정치/정책·정보모음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에 맞섰던 진압군의 삶(feat. 서울의 봄)

by JAEMJAEM 2023. 12. 12.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진압군들의 삶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해도를 위해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온 인물을 위주로 정리하였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정승화
정상호 / 정승화

 

정승화 대장은 10.26 사태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에 의해 12월 13일에 해임되었습니다. 이후 1980년 3월,  1980년 3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 의해 1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강제 예편), 불명예 전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등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했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었습니다.

 

국군보안사령부로 강제 압송되어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1981년 3월에 사면, 복권된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87년 대선 직전에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영입되어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1988년에는 군적이 회복되어 예비역 육군 대장의 자격을 되찾았습니다.

 

1993년에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본부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고발했는데,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하였습니다.

 

1997년에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후 2002년 6월 사망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태완
이태신 / 장태완

 

장태완 장군은 체포 이후 서빙고에서 45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강제 예편되어 군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출감 후 6개월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 생활을 하였는데, 특수수사대 요원 두 명이 봉천동 자택에 상주했기 때문입니다. 

 

12.12 군사반란 소식을 접한 장태완 장군의 부친은 막걸리 외에는 식음을 단절하고 이듬해 4월 별세하셨습니다. 연이어 장태완 장군의 외아들 장성호 씨가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택연금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갔던 장성호 씨는 1982년 아침, 책을 보던 장태완 장군에게 여느 날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대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민정당 권정달 사무총장과 박준병 보안사령관에게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튿날 서울대 당직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장태완 장군의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고 합니다. 아들이 낙동강 인근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 근처였는데, 시신은 꽁꽁 얼어 눈, 코, 입 외의 모든 구멍에 얼음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 9일로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 사건을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1994년에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하였고,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제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2010년에 폐암으로 별세하였는데, 2년 뒤 아내 이병호 여사가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헌병감 김진기

김진기
김준엽 / 김진기

 

김진기 헌병감은 체포 후 육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1980년에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하고 군을 떠났습니다. 1987년에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였는데,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이런저런 보직을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1990년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에 예비역 장성들인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하였습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정병주
공수혁 / 정병주

 

부하들의 배신으로 총상을 입은 채 반란군에게 체포된 정병주 사령관은 보안사로 끌려가 험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강제 예편된 이후에는 성당에 다니며 기도하는 것 외에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1987년, 노태우의 12.12 군사반란 미화 발언을 보고 기자회견을 열어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다 1988년 10월 실종되었고, 이후 실종 139일만인 1989년 3월에 야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정되었습니다.

 

김오랑 소령

김오랑
오진호 / 김오랑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사령부에 들어온 반란군에 맞서다 6발을 맞으며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시신은 사건 발생 직후 특전사령부에 뒷산에 가매장 되었으나, 사건 다음날 후임 특전사령관 정호용의 지시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이었던 김충립의 증언에 의하면, 반란을 주도했던 보안사령부 측에서는 시신을 조용히 가족에게 인계되, 부대장을 치르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김오랑 부인인 백영옥 여사는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충격으로 완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백영옥 여사는 앞을 보지 못해 일상생활을 못하는 상태였는데, 군인아파트에서도 쫓겨나 고향 부산의 복지지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정병주 사령관 사망 이후 백영혹 여사는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SNS 기록에 따르면, 소송을 위해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소송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고, 이후 1991년에 부산 영도의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찰이 사망원인을 자살로 발표하였는데, 유족들의 반발로 슬쩍 실족사로 수정하였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12.12 그 후, 하나회 회원들이 맡았던 주요 요직(feat. 서울의 봄)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 하던 하나회는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이후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게 도비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까지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존속했습니다

imojeomo365.tistory.com

 

 

'노 빠꾸'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사건 총정리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하나회 파멸을 선언해 왔습니다. 그리고 취임 일주일 만에 계급에 상관없이 하나회 소속 별을 40개 넘게 떨어뜨리며 본격적으로 하나회 숙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imojeomo365.tistory.com

 

댓글